K는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창 밖을 무심히 보던 K의 말에 K에게 비스듬히 기대어 졸던 나는 자세를 바로 고치고 K를 쳐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왜?"
나는 대충 K가 왜 신의존재에 대한 얘길 했는지 알 것 같았다.
K는 분명 버스 창 밖으로 교회나 성당 아니면 불교용품 판매점을 봤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K가 불현듯 꺼낸 화제의 이유를 물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K는 내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이어갔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인간이 만들어낸 체계야. 거기에 목숨걸고 투자하는 사람들은 속고 있는 것이겠지. 특히 난 창조설 같은 것이 어째서 그렇게 믿음을 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이미 DNA나 단백질 같은 건 어떻게 발생이 되었는지 다 증명이 되어 있거든. 종교에서 말하는 태초 인간의 탄생신화들이 너무 단순하고 터무니없다는 걸 느끼게되지. 옛날이니 가능한 얘기지 지금도 그것들을 믿는다는 건 우스운 거 아닐까? 이젠 과학적으로 증명을 할 수 없다면 하나의 픽션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시대야. 너도 교양과목 하나정도는 나와 함께 자연과학을 듣는 게 어때? 전부 너의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라고."
K는 은근히 나를 부추기며 수업에 대해 말했지만 K의 신에 대한 견해를 듣자 나는 문득 내 남자친구인 P를 생각해냈다.
"하지만... P는 그렇게 생각 안 하던데... 신의 존재에 대해 항상 감사한다고 했어. "
"네 남자친구 말은 믿을게 못돼."
K는 P의 얘기가 나오자 굉장히 기분 나쁜 어조로 말했다.
K와 P는 예전부터 사물에 대해 매우 다른 주장을 했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 다 똑똑했기 때문에 둘의 얘기를 각각 듣고있으면 나는 둘 중 어느 사람의 의견이 더 옳은지 판단해 낼 수 없었다.
어쨌건 그 자리엔 P가 없었기 때문에 난 그의 입장에서 말했다.
“나름대로 종교에도 증명할 만한 이론이 있대."
"그것들은 과학으로 체계적 연구를 할 순 없잖아. 다 심리적이고 애매하지. 모순적인 면도 많고 결론도 나지 않아. 난 완벽한 이론 편에 서는 거라고."
K는 내가 P의 의견을 두둔하자 기분이 안 좋았던지 강하게 자기의견을 내세웠고 나는
더 이상 할말이 없어서 고개를 떨떠름히 끄덕일 수 밖 에 없었다.
K는 흥분상태가 가라앉지 않는지 한동안 얼굴빛이 안 좋았고 나는 그런 K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말했다.
"나도 무교 이긴 해..."
표정을 살피며 말끝을 흐리는 내게 K는 말했다.
"무교?"
"그래. 나도 너와 같이 종교가 없긴 마찬가지야 "
K의 표정이 다소 완화되어 나는 마음을 놓았지만 K는 다시 나의 말을 반론했다.
"난 무교가 아니라 무신론자라구."
"뭐? "
"잘 생각해봐. 무교란 건 종교에 의존하지 않을 뿐이야. 한마디로 넌 신을 믿지는 않지만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건 아니야. 그런 면에선 나와 다르지. "
나는 날카로운 K의 반응에 대응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K가 말하는 것이 무엇
인지 이해할 순 있었지만 그런 단어 하나 하나를 따져가며 생활하는 K 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번 역은 서울 남부 초등학교 앞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나와 K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우리가 내린 버스는 먼지와 매연을 일으키며 길 너머로 사라져갔다. K는 버스가 사라져간 쪽을 흘기며 말했다.
"역시 지하철을 탔어야 했어. 15분이나 늦었다구. 도로상황은 예측이 불가능 하니까 버스는 정확하지 못해. 그에 비해 지하철은 정확하고 빠르지. 그리고 일렬로 이어져있는 규칙적인 디자인과 속도에 따라 다르게 반복되는 지하철 특유의 소리도 마음에 들어."
나는 '소리가 아니라 소음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고 그냥 묵묵히 걸었다.
K와 나는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동네 어귀에서 두 갈래의 골목길이 나오자 K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 보자"
나는 K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K는 돌아서서 골목길 저편으로 걸어갔다.
나는 K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내겐 K의 뒷모습을 보는 일이 아주 익숙하다. K를 만난 지 이젠 9년이 다 되어가니까.
처음 만났을 때 K는 수줍음 많고 밝은 미소를 가진 소녀였다.
K는 변했다.
어느 순간 K는 과학을 신봉하였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것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처음에는 명확하고 현명해 보여 좋았었다.
그러나 요즘의 K는 그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K가 인생의 가치와 행복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장담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K는 사물에 대해 깊게 분석할 때 가장 눈이 빛난다는 것이다.
K와 함께 만나면 주로 K의 견해를 듣고 토론해 주는 것이 대화의 대부분이지만 나는 K와의 그런 대화가 싫지만은 않다.
그 다음날도 나는 K를 만났다.
K는 말했다.
"저 여고생은 s고 남학생과 교제 중이군."
시끌벅적한 패스트푸드점에서 K와 나는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K가 발견한 분석의 표적이 된 것은 한 고등학생 커플이었다.
분석거리를 좋아하는 K에게는 주위사람들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그건 결코 관심이나 호감이 아니다. 단지 K는 분석할 만한 뭔가를 쉴새없이 찾고있는 것 일 뿐이다.
"그러네."
나는 K의 말에 동조해주면서 그들을 유심히 보았다. 남색 체크무늬의 짧은 교복 스커트 그리고 종아리 중간까지 올린 토시 양말과 검정색 캔디 구두의 여고생. 그 옆엔 고등학생 치곤 키가 꽤 큰 단정한 교복차림의 남학생이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왠지 그 여고생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K의 의견은 나와 매우 달랐다.
K는 잘근잘근 씹은 빨대를 내려놓으며 K특유의 분석조로 말했다.
"과연 저 나이의 이성교제가 저 아이들의 인생에 도움이 될까? 재미나 흥미 이외의 의미를 주는 행동이 아니지. 남의 일에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저건 시간 낭비야 "
K가 그들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패스트푸드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요즘 애들은 대부분이 이성교제를 하던데... 그럼 넌 P와 내가 사귀는 것도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진 않겠구나... "
"상대가 P니까 더 부정적이지... 전에도 누누이 얘기했지만"
"알아."
나는 K가 P에 대해서 험담하는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K의 말을 도중에 끊어 버렸다.
K는 내 의도를 눈치 챘는지 그 이상 P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 K의 앞에서 P의 얘기를 꺼내서 좋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대화가 중단된 대신 K에게 물었다.
"넌 이성에겐 관심이 없는 거니?"
"글쎄..."
K는 내 물음에 말끝을 흐렸다. K도 여자인 이상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닌 모양 이였다.
K에게서 확실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나는 답답해져서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 뭐야... 지금까지 남자친구 한번도 없었잖아."
"그건 말야, 다 이유가 있지"
K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비밀이라도 있는 듯 은밀한 말투로 말했다. 실제로 K는 지금까지 접근해 오던 꽤 많은 남자들을 전부 차갑게 거절해 온 바가 있다.
"난 말야. 사실 내 결혼 계획을 미리 세워 뒀거든. 고등학교 2학년 때 결심했어. 연애와 결혼을 같은 선상에 뒀지. 그래서 나에겐 남자의 조건이 매우 중요하다구. 시기는 28세 정도로 잡아두고 있지. 나이는 위로 2살까지 제한. 수입은 최소 연봉4천. 공무원이나 의사 아님 법조계 종사자도 괜찮아. 장남보다는 역시 차남이나 막내를 선호하지. "
K는 기다렸다는 듯 결혼 조건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늘어놨고 나는 속물 같은 K의 모습에 할말을 잃었다. K는 그런 나를 오히려 몰아세웠다.
"현실적으로 계산해. 넌 이런 내가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내 생각은 그래. 난 웬만큼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남자와는 평생을 함께 살수 없어."
"이상하다기보다는... 그런 남자를 단 한번의 연애로 찾을 수 있을 것 같니? 그런 꿈을 꾸고 있는 네가 오히려 비현실적이야."
"물론 네 말에도 일리는 있어. 그런 조건을 가진 남자를 만나긴 힘들겠지. 하지만 난 그러기 위해서 기준점을 잡아 놓은 것이지. 또 나 스스로도 그 기준을 찾아도 될 만큼 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어."
대충 K의 연애관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직접 듣고 나니 기분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K는 다 먹은 종이 봉투와 컵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나를 안됐다는 듯 손으로 툭툭 쳤다.
"P는 일단 그런 면에서 자격 미달이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패스트푸드 점 을 빠져나가는 K의 뒤를 따라나갔다. 결국 K의 대화의 결론은 P를 헐뜯으며 끝났다.
K가 그렇게 못마땅해하는 P는 미대생이다. 객관적으로 봐서 외형이나 조건들도 지극히 평범하다.
그런 P와 K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은 둘의 사고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그래도 한때 미술에 일가견이 있던 K였었는데 그 둘은 이상하게도 안 맞았다.
친구와 남자친구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을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K와 나는 특이하게 친한 사이기에 그 여파가 크다. 나로서는 매우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패스트푸드 점 앞에는 바로 지하철입구가 있었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개찰구까지 내려왔다. K는 지갑을 꺼내서 카드를 빼지 않고 기계에 대었고 액수가 찍히자 그곳을 통과했다. 나도 K와 똑같은 방법으로 개찰구를 통과했다.
지하철역에서 K는 손을 흔들었다.
" 난 이만 갈게. 오늘 천문학 동아리에서 모임이 있거든 "
K는 막 도착한 지하철을 타고 사라졌고 나는 반대편 출구로 나와서 내가 타고 갈 지하철을 기다렸다.
지하철은 금방 도착했고 나는 지하철 안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탔다.
예전에는 지하철이 갑갑한 느낌이 들어서 별로 타지 않았는데 요즘엔 나도 모르게 버스보다는 모든 면에서 좀더 신속한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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